본문 바로가기

잡담/일기/기타

가을 바다.

자칭 프리랜서 타칭 반백수의 특권이죠.
비수기 주중에 여행 갔다오기. 1박 2일.
원래는 혼자 갔다오려다 그래도 혼자는 좀 뭐한 거 같아서
둘째 동생과 같이 갔습니다. 서해로.

그동안 우울했거든요.
정말 많이 우울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일본 여행을 계기로
곪았던 게 한꺼번에 터졌고요.

몇 년 전 부모님께서 이혼 직전까지 싸우셨고
그 즈음에 난 친구들 하고도 절교하고 아버지 은퇴는 다가오고
은퇴 전에 그동안 낸 축의금 회수해야 한다며 아버지가
현실적으로 무리인 나 대신 여친 있던 막내를 닥달하고
막내가 결혼 결정하자 마자 콩가루 막장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청접장 돌리던 부모님이 어이 없는 동시에
나 대신 이런저런 짐을 짊어진 막내에게 미안하고
그런데 그놈의 만화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아서 죽고 싶고

두 분 사이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태까지 가족 여행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살가운 딸 흉내내며 노력 비슷한 걸 했는데
정확히는, 가족이 파탄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광대가 발악하듯이 조증 걸린 것처럼 연기하고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부모님 비위 맞춰가며
감정노동을 했는데...

......

그때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고만 할게요.

블로그에 여행 후기들을 올리면서
'이번 여행은 이러이러해서 즐거웠어요'라고 썼지만
사실은
'이번 여행이 괜찮으면 우리 가족도 괜찮아 질 거야'라는 생각에
엄마가 거기서 했던 폭탄발언과 돌발행동,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말 따위를 뇌에서 지우고
좋았던 점을 최대한 부풀리며
'이번 여행은 정말 괜찮았어 성공이야 이걸로 우리 가족도 안심이야'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왔다는 얘기도.


지쳤어... 진짜 지쳤어.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이혼을 하든가.

하여간 일본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울고
한국에 도착하면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상담 받아야지하고 다짐 했지만
상담소 입구까지 찾아가서는 왠지 두려워서 그냥 나오고
쓸데없이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고 집에 왔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가야죠 위치도 확인했겠다
우울한 이유가 부모님 말고도 엄청 많으니까)

대신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9월 중순에. 부모님 없이.

여행을 그딴 식으로 다녀와놓고
(늘 그렇듯) 전혀 나아진 것도 달라진 것도 없는 채
또 제주도 가자는 얘기가 나오길래
머리가 확 돌아서 반발심에 그랬던 게 컸어요.
이번에는 절대 안 따라간다고. 대신 여기 간다고.

그 즈음에 여행 방송을 몇 번 봤는데
그 여행들은 참 느긋하고 좋아 보이더라고요.
내가 갔던 거랑 다르게.
전 같았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텐데
이번에는 여행지에서 받은 타격이 워낙 커서 그런가
엄청 부러웠고 나도 저런 여행을 해보고 싶었어요.

여태까지는
내가 먼저 어디로 여행 가자고 나선 적 없고
마지못해 따라가서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으니
전부 남들에게 맞췄는데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학습되기도 했고.
말 해봤자 반영되는 게 없었으니까)

이 나이 먹고 처음으로
나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을 짜 봤어요.
부모님과 있으면 못 할 것 같은 것들을 골라서.

그러니까 참 좋더라고요.

좀 비싸도 뷰가 멋있고 깔끔한 숙소를 잡아서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닐 거 없이
숙소 바로 근처 한산한 바닷가를 느긋하게 실컷 걷고
시간 상관 없이 발코니에 앉아서 파도 소리 듣고
식당 찾을 거 없이 숙소에서 싸고 간단하게 해 먹고
늦게까지 맥주랑 과자 먹고, 삘 받아서 새벽에 글쓰고 낙서 그리고
침대에 퍼질러 있어도 고개만 돌리면 바로 바다니까
여행 기분 물씬 나고. 느긋하게 체크아웃하고.

투덜대는 사람도 억지쓰는 사람도 없고
뭔가 시키거나, 못하게 뜯어 말리거나
꼭두 새벽부터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언성 높일 필요도 진상 부릴까 봐 눈치 볼 필요도
비위 맞추려고 쑈할 필요도 없고
갑자기 계획 바꿔서 일정 꼬이는 일 없이
시간 맞춰 딱딱 오는 버스를 타고
기다릴 일 있으면 근처 카페에서 느긋히 쉬고
끊임 없이 떠드는 사람 없이 노래 듣고 영상 보고
숙소든 가게든 버스든 만나는 사람들 모두 친절하고...

가장 좋은 건
누군가 싸울까 봐 걱정할 일도
실제로 싸워서 실망할 일도 없다는 거.

같이 온 둘째도 좋아했고요. 아마도.
발달 장애가 있어서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애지만
여행 내내 혼난 적도 없고
함께 간식거리 골라서 실컷 먹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놀 거리 챙겨와서
본인 하고 싶다는 대로 밤새도록 그림 그리게 놔뒀으니
좋았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혼난 적도 없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어.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다른 게 싫었던 거였음.

겨우 1박 2일이라서
너무 좋았던 순간이 진짜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아직도 그때 그 기억이 현실이 아닌 거 같음.
대낮에 몇 시간 동안 꿈 꾼 거 같고)
증거로(?) 찍어둔 밤바다 파도 영상을 청승맞게보며
가끔씩 위로받고 있습니다.


올해...
아니 그전부터 통 만화 그릴 기분이 안 났는데
비커밍 끝내고 탈진해서 의욕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냥 멘탈이 안 좋아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적인 밑천이 있으면
구린 상황을 자학 개그로 돌리며 웃어 넘길 수 있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그림으로 그리며 대리 만족 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렸던 만화들도 대부분 이런 거였고)
그럴 밑천 조차 떨어졌음.
캐릭터들이 웃고 떠들며 노닥대는 장면이 도저히 안 떠올라.
어떻게 떠올려도 거짓말 하는 거 같고.
하긴 근황 글도 억지로 쥐어짜내야 하는 마당인데.
우울하지 않은 부분을 찾으려고 힘껏 애쓰면서.

취미니 힐링이니 이것저것 해왔지만 그냥 현실 도피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그 때 잠시 뿐이지
내가 변덕 부리며 안 해버리면 그냥 거기에서 끝.
우울한 진짜 원인이 나아지지 않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사실 이번 바다 여행도 그거랑 다를 게 없겠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했던 것중에 가장 회복이 많이 된 거 같아요.
아예 집을 떠나버려서 그런가 후련하다고나 할까?
완전히 다 내려놓을 뻔 했는데.

앞으로도 가야겠다. 봄이나 가을에 한 번씩.
다음에 간다면 2박 3일로 가야지. 같은 장소 같은 숙소에.
다 좋지만 딱 하나 아쉬웠던 게
집에서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적고 이동 시간은 길어서
저녁에 도착해서 오전에 출발 했거든요.
1박 2일은 너무 짧아.

거기 말고 1박 2일로도 충분할 가까운 곳도 알아보고.
바다가 잘 보이고 금방 해변가로 갈 수 있고
깨끗하고 취사 가능한 곳.
아주 유력한 곳이 한 군데 있긴 한데 전화로 물어봐야 할 게 많음.
당장 예약할 것도 아닌데 그러기는 좀 뭐해서
겨울이나 내년 봄에 연락해 보려고요.

그리고 전에 미뤘던 상담도 꼭 받고.
먼저 밑천을 만들어놔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잡담/일기/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 8/ 8 : 근황  (21) 2017.08.08
2017/ 7/ 6 : 근황  (3) 2017.07.06
2017/ 5/ 22 : 근황  (5) 2017.05.22
2017/ 4/ 25 : 밀린 근황? (2)  (4) 2017.04.25
2017/ 3/ 14 : 밀린 근황 (1)  (5) 2017.03.14